누구나 외롭다.

이야기 2008. 9. 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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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한 켠 무언가 먹먹함이 느껴지기지 시작한 것은 달리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시간 외면해온 것들은 언젠가 동물원에서 보았던 노란색 보아뱀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채 가슴 한 켠 또아리를 틀어버렸고. 동이 트는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나는 막연한 기분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해가 높아질 쯤 도착한 부산에선 편의점 빵 한 봉지와 우유로 늦은 아침을 해결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막연하게 파도소리가 들린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터미널에서 들을 수 있는 건 교복을 입은 소녀들의 재잘거림과 화를 내는 듯 한 누군가의 통화내용이 전부였다.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태우기보다는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곤 다시 울산으로, 그리고 또 밀양으로 향했다. 달리 계획이 있었다기보단 행선지를 묻는 매표소 직원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익숙한 지명.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울산으로 가는길엔 롤랑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뒤적이며 빌 에반스 트리오를 들었고, 밀양으로 향할 땐 피엠피로 라탈랑트를 보았다. 라탈랑트는 꽤나 보았던 탓에 거의 외울정도였지만 달리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익숙함이 좋았다.

이내 도착한 밀양은 부산에 비하면 꽤나 한산했는데 코발트블루의 하늘과 한가로운 구름이 캔 커피 하나면 딱 좋을 그런 날씨였다.
이내 허기를 느끼고 들어선 식당은 조금은 허름해 보였는데 문에 달아놓은 종소리에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가 나올 뿐 역시 손님은 없었다.
점심이 훌쩍 지난 시간의 한산함에 길게 붙여놓은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추어탕 한 그릇을 시키고 자리에 놓인 신문을 집어 이리저리 넘기고 있자니 금새 뚝배기 하나가 나왔는데, 추어탕이라 하기엔 약간은 맑고 비릿한 맛이었다. 소주 한 병을 시키니 아주머니는 낮선 이름의 소주와 조그만 종지를 내어준다.

“쐬주랑 묵을라면 좀 풀어야 할 기다.”

감사하다는 대답에 아주머니가 소주잔을 채워주며 묻는다.

“학생은 여행 중 인가?”

“예 뭐.. 그런 셈 이죠”

카메라 가방 때문일까? 왜 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소주 한 잔과 추어탕을 넘기니 찌르르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금새 나른함도 느껴져 몇 수저 떠넣던 것을 멈추고 신문의 사설 면을 마저 읽으려는 찰나 딸랑이는 문소리와 함께 들어서는 사내를 아주머니가 거칠게 반긴다.
사투리섞인 대화 사이로 간간히 낡은 선풍기의 달달거림이 들리고 빛바랜 달력 넘어 어느새 들어왔는지 작고 하얀 나비 한 마리 한 마리도 눈에 들어왔다.
문득, 모든곳에 존재하신다는 ‘그분’이 계신다면 지금의 모습들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어떤 것들은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유리잔속의 개미나 벽 모퉁이의 하얀 나비처럼 말이다.

채 비우지 못한 소주병의 뚜껑을 닫고 식당을 나와 휴대폰으로 저녁 열차시간을 확인한 나는, 코발트 하늘 아래의 캔 커피 대신 좌판의 사과 하나를 대충 닦아내 입에 물면서 생각했다. 딱히 답은 없을지 모른다고.
목적지도 없이 다리가 뻐근해질 즈음 아무렇게나 앉아 바라보던 하늘에 어느새 조금씩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어릴적 소풍 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함께있던 여자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 일행과 떨어졌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사라져버린 일행탓에 여자아이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달리 어찌해야할지 몰랐던 나는 그 아이의 옷깃을 붙잡고 여기저기 헤메면서 괜찮을 거라는 말만 반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옷보다는 손을 잡아주는 쪽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몇번의 망설임이 있었을 뿐 손을 잡지는 못했던 기억도 난다.
아무튼 그렇게 꽤 한참을 걷던 우리는 결국 잔디밭에 주저앉아 남은 김밥이며 음료수들을 나누어 먹었는데 그때의 하늘도 참 맑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긴장한 탓인지 꽤나 땀을 흘렸던 기억도 나는데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아이가 건넨 손수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고마워.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르지만, 노을이 시작되는 하늘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더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우리를 발견한 일행들의 호들갑에 여자아이는 손수건과 나를 내버려둔 채 쪼르르 달려가 버렸고 그 모습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거야 라고

꽤나 어둑해진 시간에 역사에 도착한 나는, 그동안의 문자 몇 통에 이런저런 대답을 하곤 서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열차 안은 조용했고, 시간탓인지 상행선인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설레임보다는 쉴 곳을 찾는 나른함과 피곤함이 느껴졌는데 스르르 눈이 감길 즈음, 내 옆자리의 여자에게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십대 후반정도 되었을까 열차가 출발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듯한 모습이 조금은 신경쓰였는데 눈을 감고있어도 전화의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와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희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긴 망설임과 초조함과는 달리, 꽤나 밝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 나는 잠시 그녀가 다른곳에 전화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일 분 남짓의 짧은 통화를 끝낸 후 들리기 시작한 희미한 울음소리와 그 사이의 혼잣말로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눈물을 알고 있었다. 참고 참았던 것들이 더 이상 스스로 어쩔 수 없어질때, 마치 얇은 미농지 사이로 베어나오듯 스미다 비로서 터져나오는 것들을..
아마도 그녀는, 오랫동안 참았을 것이다. 스스로 괜찮을거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게 몇번이나 다짐하고 생각한 후에야 애써 용기냈을 것이다. 하지만 꾹꾹 눌러왔던 것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애쓴 후에야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방송에 자리에서 일어서던 나는, 가방 깊숙히 있던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자리에 놓았다. 역사를 빠져나와 밤하늘을 보니 서울에도 가끔은 밝은 별이 보인다는 사실과 함께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지금껏 가슴 한켠 먹먹하게 느껴지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쌀쌀해진 공기를 마시곤 줄지어 있는 택시 중 하나를 탔다. 창문을 열고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으며 심호흡도 했다. 바람이 머리를 잔뜩 헝클어 놓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문득 길을 잃었던 그때의 소풍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도, 그 아이가 전학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끝내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딱 한번 손을 잡았었다. 그때, 그러니까 소풍날, 대열의 제일 앞쪽에 있었던 그 아이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뒤쪽의 날 찾았고 조금은 당황하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그날 내내 함께 다녔고 또 함께 길도 잃었던 것이다.

왠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있던 사실. 그러니까 그애는, 내가 좋아했고 유독 수줍음이 많던 그 아이는, 누구라도 상관없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솔직하지 못했던 나는, 상처받는게 무서웠던 나는,어느새 그것마저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어느새 날씨가 쌀쌀해졌다며 여행이라도 다녀왔냐는 택시기사의 물음에 긴 여행이었다고 대답하고는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왠지 모르게 뭉클하지만 따뜻한 기분을 느끼고, 창밖의 익숙한 야경과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쓸쓸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그리고 어딘가 쉴 곳을 찾는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을 용기가 없는 나는, 또 언젠가 문득 쓸쓸함을 느끼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한참 후의 일이 될 것이다.


막연히 그립고, 또 막연히 쓸쓸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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