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이야기 2016. 9. 26. 01:12

 

 

그래. 놓아버린다면 편해질 수 있겠지. 알아. 더 이상은 너를, 더 이상은 나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것도. 어쩌면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끝났었던 거야. 하지만 더 오래 전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어, 우리에게 남은 시간보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많아진다면 좋겠다고. 너와 함께 한 기억들이 다른 모든 기억보다 많아진다면 좋겠다고. 맞아. 이제는 다 지나버린 얘기야. 하지만 말야. 나는 아직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 널 마음속에서 놓아버리고 나면 다신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네가 잠든 모습을 보고, 네가 새근새근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너의 냄새를 맡고, 너의 이마를 쓸어 올리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그랬듯 한번 놓아버리고 나면 그 마음들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말 거야.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겠지만 그럴 수밖에.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생각하겠지. 그런 시간이 있었지..라고.
그래서 나는.

아직은 그렇게 생각 할 수 없어.

너는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수면 아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늦은 계절 어딘가의 바람이 너의 머리를 지나며 익숙한 향기가 났다. 마치 새겨지듯 너는 조용히 숨을 쉴 뿐이었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에게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버렸어. 네가 곁에 있는 것이 너무 당연했고. 네가 웃거나 우는 것이 당연했고, 기뻐하거나 아파하는 모든 것들이 당연했어. 그래서 편했고 그래서 시시했고 그래서 만만했고 또 나른했지. 미안해. 네가 왜 그렇게 힘들고 아파했는지 나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아. 내가 왜 그렇게 아파하고 화를 냈는지도. 네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도. 행복하고 나른하고 고맙고 화나고 아팠던 그 모든 것들이 어느새 뒤죽박죽이 되어 불쑥 튀어나오고 사라져 버리는 동안 이제는 정말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문득 마주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언제인지, 어떤 기억인지도.
익숙해지는 것들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젠 방법을 모르겠어.

너는 이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곤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 손끝으로 잎의 단면을 쓸어내렸다. 너의 시선 그 즈음엔 조그만 언덕이 있고 잎이 작은 나무들과 조그만 풀꽃같은 것들이 있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릴 뿐이었다.
미안해요.
그때의 네가 말하고.
괜찮아.
지금의 내가 대답한다.

*

많은 것들이 희미해져 버린 지금, 너무나 선명하기에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어쩌면 아주 오래된 기억일지 모르지만, 이미 많은 것들이 흐려져버린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헤어지게 된 이유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래 전에 헤어졌다.
추억이 되지 못한 이야기와 기억들은 어느새 옅어져 사라지거나 다른 기억이 된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모든 것들이 지금보다 훨씬 선명하던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기억속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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