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

기억글 2008. 8. 4.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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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무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라디오에서 접한 것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시작된 책을 읽는 습관은 당시에도 유효했기에 거의 매일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었고, 그러다 새벽이 되면 세상에 나만 혼자 깨어있는 듯한 조금은 묘한 기분이 낯설어 항상 켜두던 라디오에 처음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당시 새벽2시라는 시간은 나에게 꽤나 부담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은 나를 무척 편안하게 해주었는데, 그것은 마치 따뜻한 햇살을 잔뜩 머금은 포근한 이불속에 나른하게 잠기는 느낌이어서 가끔은 그대로 책을 덮고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가 들려주는 음악들 속에서 잠이 들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서도 그녀의 방송은 내 하루를 마감하는 마침표 같은 것이었고, 도저히 잠이 와서 듣지 못하는 날엔 눈을 비비며 오프닝 시그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서야 잠을 청하곤 했었다.

어느새 하나 둘 카세트 테잎이 쌓여가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도 커져갔지만, 난 그때까지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고, 홈페이지도 없었으며, 게다가 나는 TV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라디오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영화얘기와, 그녀의 시선으로 듣는 세상얘기가 좋았을 뿐이었다.

체육시간, 친구 녀석이 나에게 처음으로 이상형을 물었을 때 대답했던 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녀석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그녀에 대해 물어왔지만, 녀석의 질문에 딱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라디오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이야기들이 좋다는 것 외에는...
나의 대답에 어이없어하는 녀석을 보며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얼마 후,
아마도 내 생일 얼마 전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구광본 시인의 시로 방송을 시작했고 오늘 방송이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고, 한 시간의 방송이 끝나갈 무렵 메인목소리로 헤어짐을 말하는 그녀의 작별인사를 들으면서도 난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의 방송은 끝났고, 나는 어느새 더 이상 새벽시간에는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한해 두해가 흐르면서 그녀를 떠올리는 일도 부쩍 줄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우연히 그녀가 영화음악을 다시 시작한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었다. 반갑기는 했지만 더 이상 예전 같은 설레임은 아니었고, 그녀의 방송을 듣기위해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고 기다리는 일도 없었다. 라디오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따뜻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당시의 나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라디오 속 그녀 역시도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듣지 않는 날에도 어김없이 방송을 했고, 나 역시도 그녀의 방송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려 있거나, 동아리 방에서 기타를 치며 오래된 만화책을 뒤지는 날들이 점차 많아졌다.

시간은 늘 그렇게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곤 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당시 그녀의 죽음은 적잖이 충격적이었고, 가슴 한켠이 휑하니 비어버린 느낌을 주었으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에 관한 기억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나에게 그녀는 무엇이었으며, 또 그녀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에 불과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내 상실감은 너무나도 컸다.

그때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졸린 눈을 비비고, 조그만 카세트를 머리맡에 두며, 빨간색 녹음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던 것이다.

*

오늘은 그녀의 기일이다. 매년 그렇듯 그녀의 방송시간이 가까워 오자 그녀가 생각난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떠났고 이제는 없는 사람이다. 그녀의 부재는 여전히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들은 지 4년이 흐른 지금, 처음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 지거나 목이 메이지는 않는 것이다.

오래된 카세트를 넣고서, 언더락스에 얼음과 위스키를 채우니 내 모습이 비친다.
그녀가 아무 일 없이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지금 그녀의 목소리 대신 친구 녀석이 내 앞에 있을 것이며. 우리는 시덥잖은 얘기들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를 회상하며 혼자 이런 식으로 그리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없기에 간절하게 느껴진다니, 서글픈 일이다.

이별은 존재보다 여운이 길며,
어떤 이별은 존재보다 아름답지만,
정말 소중한 것은 이별이 아님 존재함이다.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 이상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고, 그녀의 라디오에 엽서를 보낼 수도 없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나 사실은 당신을 좋아했어요.’ 따위의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도 없고, 용기를 내 방송국에 찾아가 싸인과 사진 한 장을 부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고 해도 쉽게 하지는 못했을 일들이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이제는 갑자기 그녀가 죽을만큼 보고 싶어져도, 평생동안 사용할 용기를 긁어모아 방문을 박차고 그녀를 찾아가더라도 그녀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별이란 그런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듣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누거나, 향기로운 커피 한잔을 건네는, 일상적인 그 무엇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것,
소중했거나, 사랑했거나, 혹은 미워했거나, 질투했던, ‘그’와 ‘그녀’로 인한 어떤 이야기도 더 이상 써내려 갈수 없는 것. 그 순간이 마침표가 돼버리는 것이 이별인 것이다.

어떤 존재함에도 이별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우리가 언제까지나 함께 할 거라 여기는 많은 것들에도 이별은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것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주 열심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자주 만나자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함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같은 우산을 쓰고, 함께 사진을 찍고, 조그만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공원을 거닐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짝사랑이라도 사랑한다고 용기내서 말하고, 편지 한 장을 쓰고선 가슴 졸이며 밤을 새워보기도 해야한다.

우리에게 이별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사랑을 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별한후 기억할 것이 없는 존재는 더욱 슬픈 것이다.


늦은 새벽, 오래된 테잎 속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쓸쓸하고 가슴시리다. 방 한켠엔 그녀의 목소리들이 여전히 쌓여 있지만 지금의 내가 그녀를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오래전 라디오 너머로 들리던 그녀의 목소리뿐이다.

나는 과연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했던 적이 있었던 것인가...



그녀의 목소리 너머로, 얼음이 녹으며 달그락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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