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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4.15 간절하면 멀어지기도 하나보다

간절하면 멀어지기도 하나보다

기억글 2022. 4. 15. 01:22

 

중학교 때 백일장에 나갔던 적이 있다. 평소 내 글을 잘 봐주신 국어선생님이 추천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마녀라고 불리던 국어선생님 이었지만 나는 내심 좋아했기 때문에 그 사실은 내게 있어 매우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쪽빛 하늘에 눈이 시린 날이었다. 햇빛이 창연했고, 초록색 물감으로 칠한 듯한 짙은 잔디 위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한 무리 서 있었다. 글을 쓸 종이를 나눠받고 아이들은 제각기 또 작은 무리로 나뉘어져 자리를 잡기 위해 흩어졌다.
하얀종이.


마음과 달리 그것을 받아든 나는 막막해졌다. 대게 내가 글을 쓰는 일은 기분이 우울할 때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경우나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나 감정을 온전히 기록하고 싶은 경우였기에 '글을 써야지,' 한다고 줄줄이 쓸 수 있는 체질이 아니었다. 꽤나 기분 영향이 큰 그런 변덕심한 아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지금까지 썼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잘 써버려서 상을 타고 싶었다. 그래서 국어선생님께 좀 더 예쁨 받고 싶은 욕심마저 있었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다. 뇌리에는 글감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랐다가 저편으로 사라지고 생각은 울긋불긋했다. 머릿속으로 구상을 해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연필을 쥔 오른손을 까딱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하얀 종이에 한글자도 쓰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하나둘 글자로 꽉 찬 종이를 제출하고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동안 나는 멀거니 하늘만 쳐다봤다. 눈이 시리게 맑은 하늘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려고 했다. 연필을 쥔 오른손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얀 종이에 한글자도 쓰지 못했던 마음. 그랬다. 글을 너무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너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이내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즈음에 너무나 자주 다투고 싸웠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가 될 말들만을 골라서 내던지고 할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들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울고불고 떼쓰고 있었다. 진심은 더욱더 깊숙이, 작은 틈으로 사라진 무엇을 꺼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더 깊숙이 밀어 넣는 것처럼, 그것은 안으로 파고들고만 있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찌 그리 서툴렀던가. 머릿속 생각들이 울긋불긋했다.


간절한 것은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평소에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것마저도 조급해진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다. 말이 엉키고 손가락이 엉키고 걸음마저 엉킨다. 그래서 평소에는 볼 수 있었던 것도 조그마해진 마음으로는 볼 수가 없다. 나는 그 조그마해진 마음에 그녀를 가두고 한없이 괴롭혔다. 아니, 그 조그만 마음속에 갇힌 것은 실상 나였다. 우리는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부러져버렸다.
툭, 우리의 관계가

부러져버렸다.

 

간절한 것은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간절하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너무 간절하면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간절함은 때론 멀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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