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가는 길

기억글 2008. 5. 8. 17:06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계천 야경



주말저녁 촛불집회에 다녀왔다. 지하철에서 집까지는 먼 거리지만 밤바람이 좋아서 걷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꽤나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후배 녀석이다.

 

“선배,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네, 갑자기 왠일이야? 너도 시집가니?”

“아니요 -_-, 선배는 오랜만에 전화한 후배한테 할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전화번호 바꾸시곤 왜 연락 안주셨어요. 서운해요”

“아- 그거? 어차피 전화해보면 알잖아. 그리고 전화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하하”

“선배가 매사 그런 식이니까 다들 멀어지는 거라고요. 그러다 나이 먹으면 정말 아무도 연락 안하고 외로워 질껄요?  저나 되니까 지금도 선배한테 연락하고 그러는 거죠, 아무튼 주말인데 뭐하셨어요?”

대학때 그래도 날 조금은 어려워했던 것 같은 녀석인데 잔소리 하는 걸 보니 이제 녀석도 예전의 그 꼬맹이는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졸업하고 취직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시집을 갔어도 갔을 나이인데 ‘내가 좀 시간에 무딘가?’ 라는 생각도 든다.

“아, 소라광장인가? 거기 갔다가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어? 거기 요새 촛불집회 한다고 난리던데, 설마 거기 가셨던 거예요?”

“응, 근데 왜 설마야?”

“선배가 그런데 갔다고 하니까 좀 의외여서요. 귀찮다고 엠티나 야유회도 안가고 그나마 한번 등 떠밀려 가던 엠티도 버스에서 뛰어내려 도망갔잖아요. 그리고 등록금인상반대 모임 있을 때마다 시끄럽다면서 멀리 돌아가고...”

참, 별걸 다 기억한다 싶다. 그런데 그런 걸 기억하는 걸 보니 내 이미지가 별로 좋지는 않았겠구나 싶어 얼마 전 어색하게 인사하던 후배들이 이해가 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라도 좀 사주고 엠티라도 한번 갈 것을, 아무튼 이제와 후회하면 무엇하랴 그때로 돌아간대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데.

“사실, 가긴했는데 조금 있다가 밥 먹고 그냥 왔어. 지금도 시끄러운 곳은 별로더라고.”

“그럼 만여명이나 모였다는데 조용할줄 아셨어요? 그리고 선배가 집회라는 거 늘 주최가 있고 목적이 있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었잖아요.”

“그런말 했던 기억이 없는데?”

“분명 말했었어요 선배.”

다시 한번 생각해도 기억에 없다. 난 말을 간략하거나 멋있게 하는 재주가 없어 비슷한 말을 했더라도 주절주절 말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라는 건 참 많은걸 포장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나도 뭐 구호나 그런 걸 외치려고 간 건 아니고, 그냥 가보고 싶더라고. 구석에서 조용히 촛불이나 켜고 앉아 있다가 오려고 했지. 내가원래 촛불을 좋아하는데 공원에서 촛불켜고 혼자 쪼그려 앉아있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거 아니냐. 하하-”

“썰렁해요 선배”

“미안하다. 잠시 빙의가...”

“재미없어요.”

“알았다. 그런데 너 너무 매정한거.."

“그건 그렇고 잠깐이나마 만여개의 촛불중 일부가 되신 소감은?”

무자르듯 싹뚝 자르고 말하는걸 보니 농담같은건 받아줄 생각이 없나보다.

“아- 그게 생각보단 별로였어, 그러니까 일찍 나왔지”

“그래요? 뭐가 그렇게 별로였어요?”

“뭐 나도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맘에 안 들기는 하는데, 뭐랄까 진행이 좀 감정적인 면에 많이 치우쳤다고 할까? 말도 좀 거칠고 대학생들 인가 몇 명 나와서 노래라고 가르치는데 내용도 좀 자극적이고 율동이라는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고 흔드는 건데 어린 중고등 학생들이 따라하는거 보니까 별로 보기 좋지는 않더라고. 개인적으론 모인 사람들의 감정보다는 생각을 유도했으면 했는데 그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더라.
그리고 근처에선 지나가는 노인 분들이랑 시비도 붙어가지고 좀 시끌시끌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나이든 분에게는 안 그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내가 시끄럽고 사람 많은걸 싫어해서 그런지 나중에는 경찰들까지 몰려와 방송을 하니까 더 있기도 힘들더라고.“

“아- 역시나 시끄러웠군요. 그런데 어린학생들도 많이 왔나봐요?”

“응, 거기 모인 대부분이 젊은 층이던데? 그러고 보니 투표권 없는 중고등학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같은 20-30대들은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 어느정도 책임을 느끼고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누군가 나타나서 ”국민이 뽑아준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하는 정책인데. 반대한다고 여기모인 너희는 소수일 뿐이지 않느냐?“ 라고 말하면 딱히 반발하기 힘든것도 사실이잖아.
결국 대의민주주의 라는게 국민이 뽑아준 사람들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신해 정치한다는 건데 막말로 어떤 정책에 대해 국민의 99%가 반대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만한 합법적인 절차가 없잖아. 그러니 뽑을때 잘 뽑아야 한다는 건데 이번 투표율은 50%도 안됐고 그중에서도 우리쯤 세대가 제일 투표율이 낮았다고 하니까 마냥 불만만 털어놓기에도 좀 그렇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해요. 뭐 남얘기 할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사람들 그런거 있잖아요 ‘난 정치 같은건 관심도 없고 기대도 안해’ 라는 소위 ‘쿨’한 태도. 사실 그게 쿨한게 아닌데.” 

대학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진지하게 대꾸하는 모양새나 말투가 꽤나 어른스럽다. 하지만 녀석의 한결같이 명랑하던 얼굴이 떠올라 어느새 진지해진 분위기가 조금은 이상하다.

“그래도 2-30대 대다수가 그렇게까지 무관심 한건 아닐텐데. 내 생각엔 개인의 한표라는 것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자기주장이 분명한 2-30대를 ‘사회적 태만’에 빠지게 한 것 같아.
그러고 보면 나도 거기모인 사람들 중 만여명 이라고 뭉뚱그려지는 숫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자리 털고 일어나는 게 쉬웠지. 만약에 현재집회인원 만 이천 삼백 칠십 한명이라고 전광판에 크게 나오는 중 이라고 생각해봐 그런데 내가 중간에 촛불끄고 일어나는 순간 그 숫자가 만 이천 삼백 칠십명으로 바뀌는 거야. 그럼 조금은 일어서는 게 망설여지지 않을까? 뭐 뒤통수가 찌릿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안그래?
아무튼 촛불집회라는 것도 일종의 합산적 과제라고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중간에 일어나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할거야.’ 라는 무임승차 동기도 한몫한거지.”

“예? 그러니까 결론은 선배는 촛불집회를 갔는데 시끄러워서 싫었고 전광판이 없으니까 무임승차 동기가 발생. 결국 아무 거리낌 없이 먼저 일어나서 저녁먹고 집에 가는 길이라는거죠? 결국 엠티가다가 버스에서 뛰어내려 도망간거랑 같은거네요?”

역시나 계속 진지할리가 없다. 수화기 너머로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웃음이 느껴진다. 녀석의 웃음은 가끔 짓궂기는 해도 환기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야! 그때는 잠깐 담배핀다고 내렸는데 버스가 가버린거라고.”

“예~예~ 고작 담배피려고 교수님 몰래 창문으로 뛰어내리셨어요? 게다가 핸드폰도 안받으시던데요? 선배 사라졌다고 20분 넘게 버스 째로 기다렸는데 혹시 쿠바산 시가를 어디선가 몰래 피셨나요?”(웃음)

“너 스토커지. 그리고 나 그때 전화 받아서 안간다고 분명히 얘기 했거든? 그런데 계속 가자고 전화하고 기다린 너희가 잘못이지 그리고 버스도 20분이 아니라 15분 정도 기다리다가 갔다고!”

“오호~ 어디선가 버스를 지켜보고 계셨군요. 역시...”

도대체 이 녀석의 머릿속에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이 녀석을 만날 일은 피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나저나 시집은 안가냐? 전에 남자친구 군대 갔다고 했지?”

“선배! 할말 없으니까 또 그 얘기. 선배는 시집얘기 말고는 할 얘기 없죠? 그리고 갸 제대한지가 언젠대요. 벌써 졸업하고 회사 다녀요. 그러는 선배는 장가 안가요?”

“뭐, 나야 능력이 없잖아. 그리고 외모나 성격도 별로고”

“음... 다른건 모르겠지만 성격쪽은 확실히 공감이 가는데요? 엠티도 도망가고 촛불집회도 도망가고~”

녀석, 또 놀리면서 웃는다. 나이는 먹어도 장난기는 여전한가 보다. 그러고 보면 녀석은 잘 웃고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나를 잘 따랐다. 그건 그만큼 사교성이 좋았다는 것이다.

“계속 놀리면 맞는다.”

“제 남자친구 싸움 잘하는데요?”

“난 달리기 잘해”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건, 멀리서 돌 던지고 도망가면 못 잡을거라는 말이지. 하하하-”

“흠...
확실히 비겁하지만 가능은 하겠네요, 하지만 언젠가 잡히게 된다면 죽도록 맞을껄요?“

녀석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잠시 함께 그렇게 웃다가 언젠가 한번 보자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밤바람이 선선하다. 집에 가는 길은 나름 유흥가라 네온사인들이 화려하고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정장차림으로 담배를 물고 통화하는 사람, 떡볶이를 열심히 젓고 계신 아주머니, 화려한 복장에 비해 귀엽게 생긴 아가씨, 시끌시끌한 젊은 남녀들 무리까지. 하나 둘 눈에 들어오고 지나친다. 나 역시도 그들에겐 지나가는 행인3 정도일 것이다. 정말 운이 좋다면 술기운 오른 누군가의 시선엔 나름 괜찮은 청년 정도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지되는 공간 안에만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만 정작 지금껏 살면서 연락하거나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몇명뿐인걸 보니 금새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 무슨 인연인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허무하다.
하지만 웃는것도 화나는것도 대부분 누군가로 인해 생기는걸 보면 인간관계 허무하다고 무인도에 가서 로빈슨크루소 아저씨처럼 뚝딱뚝딱 나무집 만들어 놓고 혼자 사는것도 그리 할짓은 아닌것 같다. 게다가 로빈슨아저씨는 결국 프라이데이라는 부하겸 친구가 하나 나타났으니 완벽히 단절된 삶도 아니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오늘 개인적인 인연은 없지만 대통령 덕분에 광화문도 갔고, 전경들 때문에 어지럽긴 했지만 사람구경도 하고. 오랜만에 통화한 후배녀석 때문에 실컷 웃기도 했다. 게다가 길에서 부딪힌 단발머리의 귀여운 아가씨가 셔츠에 커피를 묻혀 죄송하다며 연락처도 건네었으니 인연이란 그 얼마나 좋은것인가.
물론 마지막 얘기는 농담이다. 담배를 꺼내다가 부딪친것은 내쪽이었지만 오히려 그 아가씨가 몇번이고 미안하다며 황급히 고개 숙인데다 요새 커피는 아쉽게도 뚜껑이 있어 단 한방울도 튀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치듯 멀리 사라져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데 문득 아까의 놀란 토끼눈이 떠올랐다.
'내얼굴이 그리도 험악한가? 사교성이 약하면 인상이라도 좋아야 한다던데..'

긴 한숨과 함께 하얀 연기가 밤공기 사이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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