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고

이야기 2008. 12. 5. 21:11

 

“알았어요, 저 이제 그만 잘래요.

띠 릭 -
그 순간 전화는 끊어졌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끊어진 휴대폰엔 그 아이의 목소리처럼 통화시간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한 시간 이십사 분.
어느새 우리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하루의 일과, 각종 사건들에 대한 생각, 그리고 주변의 이야기들. 하지만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서로 알게된지는 오래 되었지만 6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긴 시간동안 계속 가까웠던 사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친하다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는 것에 가까웠고, 거기서 딱히 더 가까워지기엔 조금은 조심스런 그런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와 최근 들어 부쩍 자주 통화하게 된 이유나 계기는 알 수 없다. 왜일까?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에 눈꺼풀이 감기면서도 그렇게 자주, 또 그렇게 오랫동안 통화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끊어진 전화를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통화 중에 온듯한 메세지가 보인다.
‘새 메시지 3건’
가장 처음에 온 메세지를 보았다.

‘선생님 혹시 우리 언니 어떻게 생각하세요?’

몇 달 전부터 가르치던 학생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세지.

‘선생님, 장난 같지만 언니가 선생님 정말 좋아한대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 아이의 말투와 늘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몇 번 마주치지도 않은, 대학생이라던 그 아이 언니의 얼굴도 떠오른다.
내가 뭔가 실수한 것이 있었던가.

‘저요, 선생님은 말도 안 된다고 언니에게 얘기했었는데, 언니가 너무 힘들어해서요... 죄송하지만 꼭 대답해 주셨으면 해요, 어렵게 보내는 거예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고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도 오랜 침묵이 느껴졌다.
왜 이런 문자가 오는 걸까. 게다가 좋아한다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
장난일지도 모르고 진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는 동안 방금까지 통화했던 아이가 떠올랐다. 같은 시간, 누군가는 서운하다 말하고, 누군가는 좋아한다 말했다. 문득 한번쯤 용기내어 만나봤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화가 조금씩 길어지고, 마음이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심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 이제 그만 잘래요.” 화난 듯 전화를 끊던 그 아이의 목소리,
거리를 유지했기에 그 아이는 내게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단지 전해 줄 것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날 우리는 함께 영화도 보고 저녁도 먹었다.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모든 어색한 자리가 그렇듯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 말하는 침묵속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내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응?”
왠지 낯선 모습, 조금은 야위어 보이는 그녀는 실내의 낮은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맥주 때문인지, 예전과는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나같은 사람 말고, 정말로 오빠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별 얘기 아니라는 듯, 그녀가 툭하고 꺼내놓은 말에 대답할 무언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후였다. 조용한 그녀의 옆 얼굴에 한동안 많이 아팠다고, 하지만 살이 빠져서 나쁘지만은 않다던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오빠도 저 프로그램 알아?”
길 건너 빌딩의 전광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응”

“티비 안보잖아.”

“그래도 습관이란게 있으니까.”

“아.. 잠들기 전에 티비 켜는거?”

맥주잔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 건너 전광판은 나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함께 어울리는 맥주잔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 건너 전광판은 나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아주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지만 내게는 없는, 언젠가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뭔가를 한다는 건 외로워서 그런 거야.'

“오빠.”

“응?”

“이제 나가자.”

계산을 하는 동안, 가게 밖에서 휴대폰을 만지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날 보며 싱긋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나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익숙한 복숭아 향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가까워진 지하철 입구에서 핸드폰의 메세지를 확인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핸드폰 게임을 하나 받았어. 가끔은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지거든. 아마 오빠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가끔 멍하니 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아, 그리고 영화 잘 봤어. 저녁도 맛있게 먹었고, 다음에 월급타면 내가 한번 살게.”

“응.”

나는 뭔가 더 할말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지하철 역내는 조용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반대방향의 개찰구로 향했다.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개찰구 쪽으로 다가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바삐 나오는 사람들과 바삐 들어가는 사람들, 그사이로 술 취한 아저씨와 새침한 아가씨가 나오고 뭔가를 무겁게 들고 있는 아주머니와 그 뒤를 따르는 사내아이도 나온다. 그렇게 사람들의 무리를 몇번이나 지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별이라는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느껴진다는 것을.


담배 하나를 물고 테라스로 나와 과외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시간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한 대화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로 끝났고 마지막 과외비는 곧 입금해 주겠다는 짧은 문자도 받았다.
손안의 휴대폰이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어쩌면 정작 외로웠던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듯 외로움이 익숙하고 헤어짐이 당연했던 나는
사랑한다 말하지도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못했다.
6년의 시간도, 좋아한다는 말도 끊어내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한번 흘러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하루가 지나고 여전히 시리고 여전히 먹먹한 모든 것들이 익숙해 질만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보고싶다 하지 못하는 나는,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하는 나는, 티비를 켜놓고 웅크린채 잠드는 나는

여전히 외로울 것이다.

두려워 도망치는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느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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