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우유

기억글 2008. 8. 3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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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자취방에 놀러가면서 바나나 우유 한 묶음을 사갔다. 때마침 후배 녀석들과 동기들도 왔기에 나름 유쾌하게 밤을 보냈고, 다음날 나오면서 남아있는 바나나우유 중 한 녀석을 들고 나온 것이다.

바로 마시려 들고 나왔지만 깜빡하고 빨대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알아채고 계단을 다시 오르려던 찰나 선배의 집은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고, 내가 마지막에 나왔다는 사실에 결국 나중에 먹기로 결정했다. 바나나 우유와 빨대라는 것은, 어린왕자와 여우, 멀더와 스컬리, 릭스와 도너처럼 뗄래야 뗄 수없는 관계이기에 함께 있어야만 비로써 완전해 지는 것이니까
그래서일까? 내 손 위의 바나나 우유는 자신의 짝이 없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챈 듯 무척이나 슬퍼보였고, 급기야는 엉엉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미안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아무튼 저녁의 약속까지는 시간도 장소도 애매했던 나는, 의외로 통통해 주머니에는 들어가지 않는 바나나 우유를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소중히 안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바나나 우유를 안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포퓰라 나무가 시원하게 뻗은 산책로도 걷고,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콘도 사먹었다. 그리곤 조금 심심해하는 바나나우유에게 바보이반의 얘기도 해주었고 노래도 불러준 것이다. 사실 바보이반과 노래는 농담이지만 이상하게도 한참을 들고 다니다보니 조금은 친해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엔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후드티의 모자(hood) 속에 넣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바나나 우유와 함께 돌아다니다 후드속의 녀석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질 즈음, 조그만 국밥집에 들어가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켰는데 해장국을 먹으며 맞은편에 내려놓은 녀석을 바라보니 왠지 든든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머~ 바나나우유를 무슨 친구처럼 놓고 밥을 먹는대?”

그릇을 싹싹 비우는 먹는 모습이 복스러웠는지 아니면 안스러웠는지, 서비스 공기밥을 가져다주시던 주인아주머니의 말이었다.

“(우물우물) 친구 아닌데요?”

“친구 아니면 아줌마가 먹어도 되겠네.”

아주머니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나나우유 쪽으로 손을 뻗었고 난 놀라서 씹던 것을 급히 삼키느냐 기침을 했다.

“안돼요! 콜록콜록~”

“왜? 서비스로도 줬는데.. 섭섭하게”

“아무튼 안돼요.. 쿨럭쿨럭~ 대신 제가 하나 사다 드릴께요.”

아주머니는 이상한 녀석이라는 표정으로 나와 바나나 우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거참 신기한 총각이네.. 기왕 사다줄 거면 우유 말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사다줘. 알았지?”

예~

나는 서비스로 받은 공기밥을 비우고, 식당 옆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아주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주머니는 호들갑스런 웃음으로 정말로 아이스크림을 사왔다고 기뻐하면서도 나와 바나나우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곤 돌아서는 내게 짓궂게도 둘이 잘 어울린다는 농담을 하셨다. 잘 어울린다니... 허허. 뭐, 생각해보니 내 행동이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반나절 돌아다녔다고 그새 이 녀석이랑 정이라도 든 걸까? 그러고보면 슈퍼의 계산대에 빨대가 있었는데도 집지는 않았다.
다음에 마주치는 가게에서는 담배를 사면서 꼭 빨대를 챙겨 녀석을 먹어버려야지 라고 굳은 결심을 한 나는, 주섬주섬 바나나 우유를 다시 후드에 넣고 건널목의 신호를 기다렸다.

이내 신호가 바뀌고 불과 몇 걸음 딛었을 때였다. 순간 섬찟함을 느껴 돌아보니,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브레이크의 굉음을 내며 내게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굳어버린 몸과 함께 모든 것이 느려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끝이구나...' 그렇다. 정말로 끝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전혀 예고되지 않은 순간, 예고되지 않은 장소에서. 많은 생각과 기억들이 영화 시네마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가지만 엔리오 모리꼬네의 Cinema Paradiso는 나오지 많았다. 나의 생은 이렇게 친구와 후배를 만나러 가는 아스팔트위의 건널목에서 끝나는 것이었고, 그렇게 마지막인 것이었다.

“멈춰!”

영화처럼 차에 부딪혀 튕겨나가는 모습을 떠올린 찰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동시에 시간이 느려지며 승용차는 슬로우 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나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누군가가 뛰어든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물리적으로 잡아당기듯 천천히 늘어지던 시간은 승용차와 나를 가로막은 사내의 몸이 닿기 직전, 마침내 틀어지듯 멈춰버렸고, 나는 그 시간 속에서 그가 낡은 로브를 걸치고 있다는 것과,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고 작은 음성이지만 공간을 채우는 소리, 음성만으로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 목소리의 일부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태초의 말씀과 함께 혼돈속에서 빛과 어둠, 시간과 의식이 생겼나니, 이제 나의 의지와 아버지의 의지로 운명을 초월하고자 하오며, 그 대가는 나의 육신의 일부로 아버지께 환원될 지어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꽉 막혀있던 수도가 터지듯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흘렀고,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내게 미끄러지던 승용차는 기묘한 각도로 나를 비껴서 멈췄다. 한참을 찌그러진 본네트가 연기를 내는 것을 보니 실제로 뭔가에 부딪친 것만은 확실한데 누구도 그 차가 무언가에 부딪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고, 어느새 다른 차들에서도 사람들이 내려 내 주위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멀쩡히 서있는 나와 찌그러진 차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했고 이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왠지 그 자리에서 달아나 버린 것이다.


그때의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가 차에 부딪히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차를 막아서는 모습을... 낡고 헤진 초록색 로브에 굵은 나무덩쿨 지팡이를 든 누군가 차를 가로막는 순간의 희미한 미소도. 낡고 초라한 옷과는 달리 앳되고 가냘프게 보이는 하얀 얼굴, 그리고 깊고 까만 눈동자.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 것 같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사실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맘속 깊은 곳에선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바나나우유였다.



“예~?!”
“그러니까.. 저 바나나우유가 선배를 구했다고요?”

“응, 그런 셈이지... 봐 여기 찌그러진 거 보이지?”

나는 테이블 위의 바나나 우유를 들어 옆구리의 움푹 패인부분을 가르키며 엄청나게 슬프고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바라보는 듯한.....

짝!!

친구 녀석이 내 등짝을 후려쳤다.

“그냥 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괜한 애 또 울리지 말고,
그리고 4시에 역삼동에서 출발한다는 녀석이 5시반이 넘어서 대학로에 도착한다는 게 말이 되냐?“

“아니, 아까 말했다시피 사고가...”

“근데 멀쩡해?”

“아니 봐봐 여기...”
바나나 우유를 들어 찌그러진 곳을 보여주려는 찰나 녀석은 이번엔 주먹을 쥐고서 엄청난 기세로 쳐다본다. 후배 녀석까지 한몫 거들며 새침한 목소리로 “선배 또 길 잃어서 헤매다가 늦은 거 아니에요?” 한다.

이런 불신풍조 같으니라고.
녀석들, 이 고귀하고도 슬프며 신비롭기까지 한 나의 경험담을 한낱 지각한사람의 거짓말로만 보고 말이야. 훌쩍훌쩍.

아무튼...

그 바나나 우유는, 헤어질 무렵 후배가 “이거 꼭 챙기세요.”라며 건네준 빨대와 함께, 내방의 냉장고 안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여러분은 제 얘기 믿으시죠?



그럼 다음번엔 자두맛 캔디가 비로서 만난 자신의 연인을 나쁜 마녀로부터 지켜내는 얘기를 해드릴께요~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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