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에 대하여

기억글 2010. 5. 3.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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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이상적인 여성상이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많은 여자 분들을 보았고, 그 중 누군가를 사귀게 되면 누구보다 그녀를 좋아했으며 그녀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반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 당시에 마주하고 있던 여성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여성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그때그때마다 만나는 여자가 저의 이상형이며, 이제 앞으로 만나게 될 누군가가 저의 이상형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기준도 없이 변덕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라고 하실지 모르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나는 지금껏 그때마다 다른 희망사항을 가지고 여자를 만났고, 그녀들 개개인은 그때마다 나의 까다로운 희망사항을 충족시키는 훌륭한 여성이었지만 그녀들과의 인연은 왠지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이었다고요. 뭐랄까 그건 마치 영화 ‘일곱 가지 유혹’에서 브랜든 프레이저가 소원을 아무리 꼼꼼히 말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겨버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터프하고 근육질의 유명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요. 라는 소원에 생각지도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되는, 뭐 그런거죠.
여담이지만, 이 영화를 보지 못했거나 그 치명적인 약점이 궁금하다 하시는 분은 한번쯤 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영화의 취지와는 무관하게 악마로 나온 엘리자베스 헐리의 매력적인 모습만으로도 남성분들께는 충분히 볼만한 영화로 기억되니까요.
그런데 지금껏 만났던 여성 중에, 그 불완전한 인연들 중에서 엘리자베스 헐리보다 훨씬 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지금도 유독 선명히 기억되는 여인이 있다는 것을 이쯤에서 밝혀야만 하겠습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저의 이상형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제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얘기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거창했던 서두와는 다르게 제가 얘기하고 싶은 이상형과 희망사항은 실은 무척이나 싱거운 것입니다. 뭐야, 저 정도를 이상형의 모습이라고 하는 거야. 라며 실망할 게 분명합니다만, 그렇게 느끼시더라도 워낙 지금껏 살아온 제 인생의 그릇이 작은 탓에 죄송할 따름이며 어떤 변명이나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어리다면 어리고 또 성숙하다면 성숙했을 나이이지만 성장환경 탓으로 여성들과 마주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저는 여자를 보면 두근거리는 기분은 느꼈었지만, 그게 이성에게서 느끼는 연애의 감정인지 어떤지 구분해 낼 능력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한번은 이제 막 친해지던 아이들과 방과 후 농구시합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이 저에게 다가와 요즘 만나는 자신들의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뜬금없는 자랑인가 하며 들어보니 그 친구가 요사이 만나는 여자친구에게 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듣기로는 얼굴도 이쁘고 성격도 나와 딱 어울리는 상대이기에 괜찮다면 제게 소개를 시켜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녀석들의 ‘딱 어울리는 상대’라는 대목에서 불안한 느낌을 받아 그 자리에선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고서 그대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날 이후 가끔 친구들에게서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면 조금은 두근거리게 되었고 많은 것들이 궁금해지는 동시에 제 상상 속에서 그 여학생의 모습을 키워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 여학생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듣길 원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얼굴조차 모르는 그 여학생과 저는 정말 잘 어울린다거나 운명의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죠.
결국, 어느 날 저는 한참을 고민하다 친구들에게 그 여학생을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습니다. 태연한척 말을 꺼낸 저에게 친구들은 다 안다는 식의 음흉한 웃음을 지었지만 저는 어찌되었든 나의 운명일지 모를 그 여학생을 꼭 한번은 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그 아이의 주소가 적힌 쪽지만을 든 채 마치 성지순례를 떠난 사막위의 낙타행렬 같은 비장한 모습으로 그 아이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한번도 지난적 없는 어둡고 무서운 골목길을 통과했고, 넓은 폭과는 달리 금새 위협적으로 위험을 알리는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넜으며, 어마어마한 높이로 우릴 내려다 보는 거대한 육교도 올랐습니다. 이 길고 험난한 여정에 대해 누군가는 그 아이의 미니홈피를 방문하면 쉬울 것을 왜 그런 고생을 하느냐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디카나 미니홈피가 없었고, 휴대폰이나 메신저도 없었으며 인터넷조차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달랑 주소가 적힌 쪽지만을 든 채 아이폰이나 태블릿 같은것도 없이 그토록 험난하고 가혹하기까지 한 여정을 해야만 했던거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지친 발걸음으로 육교를 건너 조용한 주택가에 들어서고서도 한참을 헤매던 도중 길잡이격인 친구 한명이 말했습니다.
“여기인 것 같아.”
그런데 저는 긴 여정의 끝을 알리는 친구의 이 한마디에 어께를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르기는커녕 정체모를 기분에 휩싸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주택가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겁을 집어먹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으스스한 골목을 지나거나 넓고 넓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엄청난 높이의 육교를 바라보며 느꼈던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여학생의 모습에 긴장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 주택가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집들이 많은 주택가였고 하필 그 여학생의 집이라며 친구가 찾은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모습의 주택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용암골짜기와 불 뿜는 화룡을 지나 막상 피오나 공주를 마주하고 나자 더욱 발걸음이 무거워지던 슈렉의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집을 들키지 않도록 방과 후엔 항상 먼 길을 돌아가던 나에게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여학생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시엔 세상물정 잘 모르는 어린나이였지만 그 정도의 분별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 여학생을 마치 운명의 연인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저는 실망감과 당혹감으로 어께가 처졌지만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거대한 담과 철망이 빙 둘러진 화려한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문 앞의 한 친구가 우편함을 보곤 “어? 여기가 아닌 것 같네” 라고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조용히 다가가 종이에 적힌 주소와 우편함의 주소를 번갈아 확인하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이 주소는 어디일까. 모두 궁금해 하는 사이 다른 친구 하나가 저기인 것 같다며 슬쩍 가리키는 곳을 무심결에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높고 긴 담벼락 끝의 조그만 철문너머로 생각지 못한 여학생의 모습마저 제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 눈에 들어온 아득한 모습.
커다랗고 으리으리한 주택 사이의 조그만 틈에 낡은 철문이 빼꼼히 열려있고, 그 사이로도 대부분이 보이는 조그만 단칸방에 한 여학생이 자신의 어머니와 마주 앉아 조그만 바구니에 담긴 무언가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여자 아이는 어머니와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며 우리의 시선은 전혀 모른 채 손 안의 무언가에 정겨운 시선을 떨구고 있었지요.
여학생의 모습을 본 저는 그때의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선 방금 전까지 고급스런 주택에 주눅이 들었던 자신의 치졸한 마음에 온 몸이 떨릴 정도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운명의 상대란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여인이며 그것이 얼마나 하찮고 쓸모없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슬펐습니다. 정말 인생에 있어, 이 세상의 모래알처럼 많은 날들 중 별 볼일 없는 것들에 조차 버겁다고 느껴 누군가에게 어께를 기대 의지하길 원하고, 그 사람은 정말 특별할거라 멋대로 상상하고 믿어버린 것과, 정작 자신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현실, 그 모든 진실이 만져질 만큼 가까이 느껴지자 저는 감당하기 힘들어 슬퍼지기까지 한 것입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한눈에 보이는 작은 방이 있고, 그곳엔 고개 숙인 한 여학생의 조그마한 어께와, 뭔가를 다듬는 조그만 손가락의 올망졸망한 움직임과, 혼자서 수없이 상상하고 그려왔던 연인의 모습과, 그리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지나친 많은 풍경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 자신의 이기심과 제 자신이 무엇을 괴로워하고, 무엇을 창피하게 여기는지, 또 무엇을 가지려 했고 또 무엇을 차갑게 외면했는지 하는 이런 것들이 더해졌고 그 와중에도 저의 시선 한가운데엔 한 여학생이 어머니와 마주앉아 정겨운 눈빛으로 조근조근 얘기하는 잔잔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후 다시 그 여학생을 찾은 적은 없습니다. 친구들의 많은 원성을 뒤로한 채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왔을 뿐이지요. 하지만 그 여학생의 모습을 지금의 저는 가슴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제게 무엇을 말하려 했고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지 생각합니다. 그때는 정말 알 수 없었던 것들, 뒤죽박죽 뒤섞여 감당하기 힘들었던 감정들, 물론 지금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희망하고 꿈꾸는 이상형의 모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아름다운 여성도 아니며, 어떤 수식어나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상 속에 있는 것도 아닐 겁니다. 아마도 그것은 일상의 길목이나 식탁에서 마주하는 따스하고 정겨운 어떤 종류의 모습은 아닐까요.
제게 글 솜씨가 더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히 전달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쯤에서 만족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저에게 나타날 미래의 연인에게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곁에서 가만히 바라봐주는 것만으로 무엇보다 큰 행복이라고.






*
이 글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꼭 해보고 싶은 것 스무 가지’ 와 ‘자신의 이상형에 대한 희망사항’ 중 하나를 선택하여 간략하게 적는 토론과제로 인해 작성한 글입니다. 하지만 해당 과제의 취지는 오래 전 유행했던 ‘희망사항’이라는 곡의 가사처럼 희망사항에 대한 조건을 단순나열 하는 것이었고 글의 분량으로 볼 때도 이 글은 적절하지 않아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왠지 버리기도 아까워 이렇게 올리게 되었고 지금은 이것도 나름 괜찮다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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