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대화

기억글 2008. 8. 1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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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러다 나중에 늙어서도 둘이서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한여름의 햇살이 따가운지 찌푸린 얼굴로 친구 녀석이 말한다. 녀석과 이렇게 대낮을 활보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우리는 매번 저녁시간에 만나 술잔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뭐 어때, 나는 좋은데?  왜, 너 혼자 장가가려고?”

“장난쳐? 한번 둘러봐라 다들 쌍쌍인데 우리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이런 땡볕에 대낮부터 사람을 불러내가지고..”

녀석의 툴툴거리는 얼굴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걸음을 늦추고 자연스레 녀석의 뒤쪽으로 간 후 녀석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래서 불만이냐? 응? 친구가 맛있는 거 사준다는데 그게 그렇게 억울해?”

나는 녀석의 허리를 흔들며 외쳤고 녀석은 내 손을 풀려고 애쓰며 웃음 반 짜증반인 이상한 말투로 소리쳤다.

“야! 너 왜 그래! 더위 먹었어? 가만있어도 더운데 왜 힘쓰고 난리야.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한번씩 쳐다본다. 날도 더운데 남자둘이 뭐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이다. 졸지에 구경거리가 돼버려 조금 당황한 나는 녀석을 놓아주곤 주변의 시선에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게나 대충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자.”

조금은 남아있던 녀석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가리킨 식당 앞에는 대형 가마솥이 펄펄 끓고 있는데. 물론 손님은 한명도 없다.
게다가 햇빛은 아까보다 훨씬 뜨거워 지는데 이런 날씨에 저런 곳에서 국밥을 먹을 수는 없다. 국밥 먹다 샤워를 할 것이 아니라면.

“아니, 아니, 거기 말고 그 뒤에...”

얼렁뚱땅 손을 더 뻗으며 말해 놓고 나니 그제서야 뒤쪽의 가게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 안쪽의 잔뜩 늘어져있는 강아지들도... 동글동글한 파란색의 글씨는 분명 ‘애견센터’ 라고 적혀있다. 
슬쩍 손가방향을 틀려고 하니 녀석이 말한다.

"잔인한 XX”

뭔가 더 말하려는 녀석을 끌고 대충 건물 2층의 피자집으로 올라갔다. 피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이 상황과 날씨를 벗어나야했다. 들어서고 나서야 피자집은 금연이라는 사실에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시 나가서 더 돌아다니자 했다간 생명연장의 꿈을 꿀 만큼 욕을 들어먹을 기세다. 그나마 다행히 피자집은 시원했다.

메뉴판을 가지고 온 종업원에게 몇가지 물으며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친구 녀석이 발로 톡톡 건드린다.

“왜?”

“맥주도 시키라고.”

대낮부터 술이라니, 게다가 이런 날씨에.. 한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일단 주문부터 해달라는 종업원의 표정에 일단 참기로 했다.
맥주를 추가로 주문하고, 종업원이 멀어지자 말했다.

“..자고로 낮술은 마덜 파덜도 못알아 본다고 했거늘..”

내 말에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너랑 대낮에 피자집 온 것도 모자라 둘이서 콜라 쪽쪽거리는건 더 싫다 임마. 그리고, 낮술 어쩌고 하면서 니껀 왜 시킨건데?”

“너 모자랄까봐.”

“핑계도 좋다.”


피자와 맥주가 나오고,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드니 치즈가 길게 따라온다.

“그런데 너 여자는 왜 안 만나? 저번에는 소개팅도 싫다고 안나오고.. 너 좋다는 애도 안 만나고.”

녀석은 피자에 파마산 치즈가루를 뿌리며 물었고 나는 입속의 피자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나 마야는 여야 이셔.”

“뭐?”

녀석이 꽤나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맥주를 한모금 한 후 피클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너한테는 말 안 했는데, 나 그 여자 좋아해.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안 만나는 거야.”

“뭐하는 여자인데?”

“컴퓨터 관련 일인데 나도 잘 몰라, 그쪽 카테고리 대화는 별로 재미가 없어서.”

“얼굴은?”

“얼굴? 완전 이뻐, 꼭 기네스 펠트로랑 티아 레오니를 합친 외모랄까나?”

“장난하지말고!”

버럭하다가 목에 걸렸는지 가슴을 두드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야, 어제는 데이트 즐거웠다면서 꽃다발을 보냈더라고, 메모도 있어서 열어보니까 자기가 평소에 꿈꾸던 데이트였다더라.”

녀석의 얼굴을 보니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자세히 얘기좀 해보라는 재촉에 피자를 물고 뜸을 들인 나는, 맥주잔을 든 채 말을 이었다.

“너 자꾸 평소에 내가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른다고 무시했는데, 내 얘기 들으면 깜짝 놀랄 걸? 잘 들어봐...”

쓸데없는 말 생략이라는 손짓을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지난 주말에 9시 좀 넘어 약속장소로 갔는데, 까만색 치마정장을 입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인사를 하고 가볍게 안아줬지,”

“안아? 길에서?”

“그래!, 해보니까 별로 어색하지도 않더만, 무튼 그래서 같이 약속한 클럽으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들어가니까 다들 걔를 쳐다보는데....“

“니가 클럽을 갔다고? 그게 말이 돼?!” 녀석이 내말을 잘랐다.

“야! 말 자르지 말고 잘 들어, 너 자꾸 그러면 얘기 안한다!”

“알았어, 계속 해.”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하여튼, 테이블에서 간단히 칵테일 한잔씩 마시면서 얘기를 하다가 서로 하트도 날리고 분위기가 좋아진 거야, 그러다가 내가 먼저 일어나서 그 애를 불렀지.. 춤추자고.
그래서 같이 춤을 추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걔를 꼭 안았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이렇게 허리로....”

갑자기 녀석이 맥주잔을 콱 내려놓았다. 입을 꼭 다물고 한숨을 내쉰 녀석이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너, 그거... 심즈지!”

“아! 이런.. ” 결국 웃음이 터졌다.

눈치 빠른 녀석, 좀더 놀려먹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춤춘 얘기는 뺐어야 했나보다. 나랑 춤이랑은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다는 건 녀석이 더 잘 아는 사실이니, 하긴 포옹이랑 클럽부터 이미 좀 이상했다.

“재밌냐? 응? 그리고, 심즈가 니 애인이냐?! 니가 덕후야?!”

녀석의 분노가 느껴져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아니, 니가 하도 귀찮게 한다고 툴툴거리니까...”

“알았다. 이제 여자 안 만나도 뭐라 안하고, 불러낸 것도 뭐라 안할 테니까 이따 저녁에 술이나 사.
걍 이대로 둘이 놀다가 늙어보자, 누가 서러운지.”

이제는 포기했다는 말투로 한숨을 쉬는 녀석을 보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음.. 저녁에는 맛있는걸 사줘야겠네..’ 라고 생각하며 잔을 내밀었다.

“잠깐.”

녀석은 아까 격하게 내려놓아 잔뜩 흘린 맥주를 닦으려 부족한 냅킨을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는 녀석의 뒷모습에 나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 녀석이 먹던 피자에 타바스코를 아주 열심히 뿌렸다.
카운터에서 한마디 들었는지, 녀석은 손님도 없는데 좀 떠들면 어떠냐고 툴툴거리며 냅킨으로 흘린 맥주를 닦았다. 그리고 시뻘건 피자를 의심도 없이 한입에 넣고는.....
내게 진심으로 포크를 집어 던졌다.

“그마 쫌!! 나 조오 그마 개오피고 여아으 마야야고!!!”

해석하면 이랬다.
그만 쫌! 나 좀 그만 괴롭히고 여자를 만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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